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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여행사전/이집트

[룩소르 시리즈 ④] 소년왕 투탕카멘

by TravelDive 2025. 9. 17.

[룩소르 시리즈 ④] 소년왕 투탕카멘

 


소년왕 투탕카멘은 역사의 장에서 한때 지워졌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지워진 이름이야말로 20세기 고고학과 대중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가장 강렬한 빛을 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정치의 리셋, 장송의 미학, 과학의 데이터, 그리고 미디어의 신화"가 서로 얽히는 드문 경우입니다.


"소년왕의 리셋": 종교·정치의 급유턴

투탕카멘의 즉위는 단순한 왕위 교체가 아니라, 아버지 아케나텐이 강행한 아텐 단신(單神) 숭배를 전통 다신교로 되돌리는 "정책 초기화"이었습니다. '복구석(복원비문, Restoration Stela)'을 통해 아텐 체제에서 신전들이 황폐해지고 제의가 중단되었음을 한탄하며, 신들의 질서를 되살리겠다고 선언합니다. 투탕카멘 재위 4년경으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문에서는 종교와 사회의 정상화를 국책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 선회는 소년왕 개인의 결단이라기보다 힘이 있는 대신들과 사제, 군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아마르나 체제의 후유증을 수습하는 작업이 고위 관리들의 지휘로 추진되었고, 그 최전선에 '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지닌 아이(Ay)와 전군 총사령관 호르엠헤브(Horemheb)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위 초에 왕실 거처를 테베(지금의 룩소르)에서 멤피스로 되돌리고(테베는 다시 종교 중심지로) 전통 제의를 재개했다는 점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의 이름에서도 이러한 초기화 정책이 드러납니다. 투탕카멘은 재위 초기 투탕카아텐(Tutankhaten)이라는 이름에서 투탕카아문(Tutankhamun)으로, 왕비는 앙케센파아텐에서 앙케센아문으로 개명했습니다. 개명의 정확한 시점은 학계에서 흔히 '재위 3년 전후'로 기술되며, 복구 정책과 궤를 같이합니다.


"왕 뒤의 권력": 아이와 호르엠헤브

소년왕의 나이를 고려하면 두 실권자의 존재감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아이는 궁정과 종교 의례의 핵심 축을 담당했고, 호르엠헤브는 '왕의 오른편 부채 집사'와 총사령관 등 직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소년왕의 짧은 통치는 곧 '권력의 과도기'였습니다. 투탕카멘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미망인이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보낸 이례적 혼인 요청(다하문주 사건)은, 국경 인근에서 왕자 잔난자의 피살로 이어지며 이집트 외교의 불안정성을 드러냅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 '다하문주'의 실명이 학계에서 논쟁 중이지만, 아마르나 이후 왕권의 모래바람을 생생히 증언하는 기록임은 분명합니다. 곧이어 왕위는 아이에게, 그리고 다시 호르엠헤브에게 넘어갑니다.

호르엠헤브는 아마르나 군주들의 흔적을 지우는 국가적 '기억정치'를 완결하며 제18왕조를 마무리합니다.


외교 스릴러, '다하문주'의 편지

투탕카멘이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대개 앙케센아문으로 비정됨)이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아들이 없다. 당신의 아들 하나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히타이트 연대기(『수필룰리우마의 업적』)에 남아 있습니다. 히타이트 왕자는 잔난자(Zannanza)로 알려지며, 이집트로 향하다 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속히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했습니다. 다만 편지의 주인공 '다하문주(Dakhamunzu)'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쟁이 있습니다.

 


무덤의 미장센: 네 겹의 신전, 석관, 세 겹의 관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가 왕가의 계곡 KV62의 계단을 찾아내고, 26일 틈새로 들여다본 순간 "멋진 것들이 보입니다(wonderful things!)"라고 말하는 역사적 장면이 탄생합니다. 카터의 일지에는 11월 4일자에 "First steps of tomb found(무덤의 첫 계단을 발견)"라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 내부의 장송 구조는 어마어마하였습니다. 금박 목재로 된 네 겹의 '외부 신전(outer shrines)'이 석관을 감싸고 있었고, 그 바깥과 사이사이의 좁은 틈까지 장송품으로 빼곡하게 채워졌습니다. 외곽 신전은 조립식으로 제작되어 좁은 방에 설치됐고, 가장 바깥 신전에는 '천상의 암소서(Heavenly Cow)' 등 의례 텍스트가 새겨졌습니다.

석관석영암(quartzite)으로 만들어졌고, 붉은 화강암 뚜껑은 석영암과 색을 맞추기 위해 황색으로 채색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세 겹의 인간형 관(coffins)이 놓였으며, 가장 안쪽 관은 약 110.4kg의 순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발굴진은 무덤에서 5,398점의 유물을 기록했습니다. 이 방대한 문서와 사진 기록은 오늘날 옥스퍼드 그리피스 연구소 사이트에서 열람 가능한, 근대 고고학의 대표적 성과로 꼽힙니다.


유물로 읽는 '소년왕의 취향'과 아마르나의 잔향

황금 옥좌 등받이에는 아텐의 광선 아래에서 애정 어린 왕과 왕비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텐 미술 어법의 여운이 투탕카멘 시대까지 스며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샌들 밑창발받침에는 전통적 적대 집단을 뜻하는 '아홉 활(九弓, Nine Bows)'과 포로상이 배치되어, 왕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적을 짓밟는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덤에서는 지팡이만 130여 점이 확인됩니다. 카이로 보관 기록과 연구를 종합한 ARCE의 해설은, 이 지팡이들이 왕의 위신 표시이면서 동시에 투탕카멘의 보행 문제를 암시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재사용과 여성 파라오의 그림자

투탕카멘 장송품 곳곳에는 지워지고 다시 새겨진 이름(팔림프세스트)이 관찰됩니다. 일부 물품은 '그의 남편을 위해 유효한 그녀'와 같은 여성형 수식어를 남겨, 네페르네페루아텐(네페르티티라는 주장이 유력)을 위해 준비된 장송품이 정치적·의레적 필요에 따라 급하게 투탕카멘에게 넘겨졌다는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황금 가면에서도 선왕의 명문의 흔적이 지워지고 투탕카멘 이름이 새겨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니컬러스 리브스), 보존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일부 핵심 장송품의 재사용" 자체는 유력한 시나리오로 인정받고 있지만, 재사용의 정도와 대상에는 논쟁이 남아 있습니다.

 


병과 죽음: 신화가 아닌 데이터

투탕카멘의 사인은 오랫동안 독살·사고사 등으로 회자됐지만, CT와 DNA 분석에서 좌측 다리 손상, 열대열 말라리아 감염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대의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투탕카멘의 사망한 원인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병사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지워진 이름, 그러나 세계적 아이콘

호르엠헤브 이후 국가적 차원의 '아마르나 지우기'가 본격화되면서, 아비도스 왕명표 등에서 투탕카멘과 아이, 아케나텐 일가의 이름은 통째로 사라지게 됩니다. 호르엠헤브는 복구석(복원 비문)에 새겨진 내용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우수르프(usurpation, 명문 갈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투탕카멘의 흔적이 지워진 덕분에 그의 무덤은 도굴 당하는 것을 피했고, 20세기 초 '거의 온전한 유일 왕릉'이라는 역사적 발견을 탄생시켰습니다.


왜 '역사적 비중' 이상으로 유명해졌는가

첫째, 발굴의 드라마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근대 고고학사의 전대미문급 기록성(버튼의 사진, 세세한 카드·목록), 'wonderful things!'라는 상징적 문장, 그리고 거의 손대지 않은 장송 세계의 '현장성'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둘째, 이미지의 힘입니다. 순금 관·가면, 금박 신전·전차·보물들은 '이집트=황금'이라는 문화 코드를 세계 대중문화에 각인시켰습니다. 무덤에서 5,398점이나 되는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고대 이집트의 총체적 일상·왕권·종교"를 한 번에 체감하게 했습니다.

셋째, 전시의 시대가 그의 명성을 세계 구석구석으로 확장했습니다. 1972년 대영박물관의 〈투탕카멘의 보물〉 전시는 16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으며 '블록버스터 전시'의 원형이 되었고, 1976~79년 북미 투어는 수백만 관람객을 끌어들였습니다. 전시는 보물의 장엄함뿐 아니라, 보존·운송·연출의 첨단을 결집한 '현대적 쇼케이스'였고, 이는 소년왕을 학계 밖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넷째, '저주' 신화의 미디어 파급력입니다. 1923년 카르나본 경의 사망 이후 퍼진 '파라오의 저주' 담론은 오늘날 통계 분석에서 초과 사망 위험이 없었다는 결론이지만, 대중문화의 서사 원동력으로는 강력했습니다.

요컨대, 투탕카멘은 정치적 위업보다 "발굴-보존-전시-미디어"라는 네 박자가 딱 들어맞으면서 20세기식 스타덤에 오르게 된 셈입니다. 이는 역사적 비중 대비 과잉 유명세가 아니라, 근대 유물문화와 공공 인문학이 빚어낸 상징성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