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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여행사전/이집트

[룩소르 시리즈 ②]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3세

by TravelDive 2025. 9. 13.

[룩소르 시리즈 ②]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3세

 


원정의 거장 vs. 황금기의 건축가,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3세

왜 이 둘인가?

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중흥을 만든 두 파라오-투트모세 3세와 그의 증손 아멘호테프 3세-는 성격이 전혀 달라서 함께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전자는 원정과 행정으로 국가를 '밖으로' 크게 만들었고, 후자는 외교와 건축으로 왕권을 '안에서' 찬란하게 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테베(오늘의 룩소르) 일대에는 두 왕의 손때가 묻은 유적이 지금도 압도적으로 남아 있어, 관광객들에게는 최고의 현장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1. "아루나를 돌파하라!" - 투트모세 3세, 전술과 제도로 영토를 묶다

하트셉수트 사후, 단독 통치와 17차례 원정

하트셉수트가 사라진 뒤 단독 통치자가 된 투트모세 3세는 약 20년간 17차례에 이르는 레반트(시리아-팔레스타인) 원정을 전개해 이집트의 영향권을 극대화했습니다. 그의 '전쟁 연대기(Annals)'는 테베의 카르나크 아문 신전 내부, 제6탑문 뒤쪽의 내실과 투트모세 3세 축제전(Akh-menu) 등에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연도·루트·전리품까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남긴 귀중한 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메깃도 전투 - '아루나(오늘날 이스라엘의 와디 아라)' 좁은 길을 택한 승부수

첫 대(對)레반트 원정의 하이라이트는 메깃도 전투입니다. 보통 장군들은 북쪽(요그네암)이나 남쪽(타아낙) 같은 안전한 길을 권했지만, 파라오는 한 줄 종대로 겨우 통과 가능한 중앙의 '아루나' 협곡을 강행해 적의 허를 찔렀습니다. 이 과감한 선택이 전투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이어진 포위전 끝에 메깃도는 함락되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와디 아라가 아루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전 연구와 최근 정리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질이자 유학생" - 속국 통치의 핵심 장치

투트모세 3세는 무력만으론 패권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속국 제후들의 장남을 이집트 궁정으로 보내 교육(이른바 '카프(kap)' 제도와 연동된 궁정 교육)하게 하고, 공납과 군역을 의무화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차세대 지도층을 이집트화하여 반란 가능성을 낮추는 "제도적 안전장치"인 셈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른 시기의 외국 왕자들을 인질 겸 학생으로 파견해 궁정에서 기르는 관행은 신왕국의 대외 지배 방식으로 널리 확인되고 있습니다.

카르나크에서 꼭 봐야할 유적! '아카메누(Akh-menu)'와 제7탑문

룩소르를 여행하신다면 카르나크 아문 신전에서 투트모세 3세와 관련된 아래 유적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축제전(Akh-menu): 투트모세 3세가 세운 기념 전각으로 내부에는 그의 연대기와 더불어, 원정에서 가져온 이국의 동식물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른바 '식물원(Botanical Garden)' 부조(벽면에 새긴 조각)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부조는 "세계 최초의 과학적 기록식 식물 도감 같은 방"이라 불릴 만큼 디테일이 뛰어납니다.
  • 제7탑문: 투트모세 3세의 적 제압 장면과 함께, 레반트 일대 정복 도시·지명 목록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목록에서 팔레스타인-시리아 도시 명단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2. "전쟁보다 건축" - 아멘호테프 3세, 황금기의 취향과 권력

평화·외교, 그리고 미감의 시대

투트모세 3세로 다져진 패권 위에서 아멘호테프 3세(재위 기원전 1390~기원전 1353)는 대규모 건축과 외교 결혼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누비아 솔렙(Soleb)의 장대한 신전과 테베 서안의 말카타 궁전, 테베 동안(룩소르)의 룩소르 신전 확장 등이 그의 대표 업적입니다. 이 시기의 외교 문서(아마르나 서신)는 금을 내고 말·구리·보석을 들여오는 등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룩소르 신전 - 아멘호테프 3세가 시작한 '그랜드 콜로네이드'

룩소르 신전의 핵심 볼거리인 대열주(그랜드 콜로네이드)아멘호테프 3세가 건립을 시작했고, 장식은 투탄카멘·호렙헤브(호렘헤브) 등이 완성했습니다. 신전 정면의 거대 제1탑문과 람세스 2세의 조각상·오벨리스크는 후대에 증축되었지만, 콜로네이드와 태양의 중정은 아멘호테프 3세의 미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벽면의 오페트 축제 부조도 꼭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5대 기념 스카라브" - 왕의 업적을 '비상(飛上)'시키다

아멘호테프 3세는 대형 기념 스카라브를 대량 제작·배포해 치세 소식을 제국 전역에 알렸습니다. 스카라브(scarab)는 곤충의 일종인 스카라베이집트왕벌레를 본뜬 조각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부적이나 인장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스카라브 대표 5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자 사냥 스카라브: 즉위 1~10년 동안 사자 102마리를 활로 잡았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 야생소 사냥 스카라브: 치세 2년에 야생소 96마리를 사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결혼(티예) 스카라브: 왕비 티예와 부모 유야·투야의 이름을 명기해 '비(非)왕가 출신'이던 티예의 격을 공식화했습니다.
  • 길루키파 스카라브: 미탄니 공주 길루키파가 317명의 시녀와 함께 이집트에 왔다는 외교 혼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호수 스카라브: 왕비 티예를 위해 길이 약 3,700 큐빗×폭 700 큐빗(대략 1.9km×0.36km)의 인공 호수를 팠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왕비 티예 - 비(非)왕가 출신의 '정치 파트너'

티예는 왕가 출신이 아니었지만 대왕비(Great Royal Wife)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DNA 연구로 왕가의 계곡에 있는 KV35('엘더 레이디' 미라)가 티예로 확인되었고, 베를린에 소장된 티예의 초상 두상(출토지로 자주 거론되는 메디넷 엘-구로브)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왕가의 계곡, KV35에서 티예 왕비의 미라가 발견된 이유는?

신왕국 말~제21왕조에 무덤 약탈이 극심해지자, 테베의 아문 사제들이 왕·왕비 미라들을 수습해 안전한 은신처로 옮기고 재포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티예의 미라도 원래 묘에서 옮겨져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 곁방에 다른 왕실 미라들과 함께 숨겨졌고, 먼 훗날인 1898년 KV35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신이 된 파라오"와 '딸-왕비'

아멘호테프 3세는 생전에 신격화되었고, 누비아의 솔렙에서는 아문과 함께 자신(네브마아트레)의 신전까지 세웠습니다. 더 나아가 왕녀 시타문(Sitamun)딸들을 대왕비로 격상하는 이례적 조치도 취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화장품(콜) 용기에는 "왕의 딸이자 대왕비 시타문"이라는 칭호가 남아 있습니다.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 - 실력으로 신격화까지 간 평민 엘리트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는 서기·감독관으로 발탁돼 왕의 장례신전과 대형 공사를 총괄한 뒤, 사후에는 치유의 신격으로까지 숭배되었습니다(프톨레마이오스기에 재부흥).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등에는 그의 좌상(서기관상)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는 아멘호테프라는 이름이 흔하였고, '하푸의 아들'을 통해 파라오의 이름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3. 투트모세 3세 및 아멘호테프 3세와 관련된 유적 관람 방법!

카르나크 아문 신전 (룩소르 동안)

  • 제1탑문-대열주(람세스 2세기)-중앙 성역-제6탑문 뒤 내실/아카메누(Akh-menu)-제7탑문 순으로 관광. 아카메누에서 '식물원' 부조연대기(Annals) 벽면을 볼 수 있습니다. 지명·전리품 표기가 '텍스트의 숲'처럼 이어집니다.

룩소르 신전 (테베 동안)

  • 아멘호테프 3세의 대열주, 오페트 축제 부조, 람세스 2세의 제1탑문·좌상·오벨리스크, 로마성채·이븐 알-하자즈 모스크의 중첩 등 다양한 유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스핑크스대로(카르나크-룩소르 연결, 약 2.7km)

2021년 재개방된 스핑크스대로는 카르나크와 룩소르 신전을 잇는 행렬로(‘오페트’의 주무대). 길이 약 2.7km로 소개되며, 카르나크·룩소르 두 신전의 입장권을 보유하고 있으면 관람이 가능합니다.

테베 서안 - '멤논의 거상'과 아멘호테프 3세 장례신전

서안 평야에 우뚝 선 '멤논의 거상'은 사실 아멘호테프 3세의 좌상 한 쌍이자, 뒤편에 펼쳐졌던 왕의 장례신전의 '현관 표식' 입니다.신전은 홍수·전석 채취로 거의 사라졌지만, 수십 년째 이어진 국제 보존 프로젝트가 거대 조각과 구조물을 꾸준히 복원 및 재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새로 세워진 석상·문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관광객을 위한 '포토 스팟과 큐레이션 포인트'

  • 메깃도를 떠올리며: 카르나크 제7탑문에서 '적을 내리치는 왕' 장면과 함께 지명 리스트를 찾아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름 옆에 매여있는 포로 모습은, 메깃도 승리 후 바쳐진 전리품과 포로의 기억을 상징합니다.
  • 식물원의 디테일: 아카메누의 '식물원'에는 양귀비·갈대·이국의 가젤·기린을 닮은 동물까지 당시 이집트인이 '타자의 자연'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려주는 도감식 묘사가 즐비합니다.
  • 룩소르 대열주: 열주 사이 벽면의 오페트 축제 장면은, 신의 바크(성선)가 스핑크스대로를 통해 카르나크↔룩소르를 오가며 왕권 재생을 시현하는 장엄한 퍼레이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멤논의 거상: 새벽에 불어오는 바람 속 '노래하는 멤논' 전설(고대 로마인들이 들었다는 균열음)도 한 번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요즘은 소리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아침 빛에 드러나는 석영사암의 표면은 사진 찍기가 아주 좋습니다.

5. 끝으로 - 두 왕이 남긴 '현장성'의 가치

투트모세 3세는 과감한 전술과 제도 설계로, 아멘호테프 3세는 취향과 외교·건축으로 같은 제국을 다른 방식으로 키웠습니다. 테베에 가면 이러한 차이가 오히려 하나의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카르나크의 문자와 부조, 룩소르의 열주, 서안의 거대 조각-모두가 "이집트 황금기의 무게"를 관광객의 눈높이에서 몸으로 느끼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