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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여행사전/이집트

[룩소르 시리즈 ③] 아케나텐(아멘호테프 4세)과 네페르티티 이야기

by TravelDive 2025. 9. 14.

[룩소르 시리즈 ③] 아케나텐(아멘호테프 4세)과 네페르티티 이야기

 


태양 원반의 도시, 아케트아텐 -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사막의 고요 속에 남은 기단과 제사대, 절벽을 따라 빙 둘러 선 거대한 비문들. 이곳 텔 엘 아마르나는 파라오 아케나텐(아멘호테프 4세)가 "태양 원반 아텐"만을 높이겠다며 도시 자체를 신학으로 설계했던 장소다. 그 곁에서 네페르티티는 왕과 거의 대등한 주연으로 제의를 이끌었다.


1. 무엇이 그를 "종교 개혁자"로 만들었나

아케나텐(재위 기원전 1353~1336)은 즉위 초기부터 태양 원반 '아텐'을 특별히 높였습니다. 특히 아문(아멘) 신단이 지나치게 막강해졌다고 생각하여, 즉위 4년 무렵부터 기존 신들의 이름과 형상을 지우게 하는 등 아문 숭배 억제 조치를 단행합니다. 이는 점차 다른 신들로까지 확장되었고, 결국 왕과 아텐만이 중개자와 절대신인 체계로 바꿔나갔습니다.

학계에서는 그가 절대일신교(monotheism)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일신숭배(monolatry/henotheism)였는지를 놓고 지금도 토론합니다. 대체로 그의 종교는 후기로 갈수록 배타성이 강해졌고, 기존 신들의 폐쇄·제한이 분명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모입니다.


2. '아텐'의 이름이 바뀐 이유 - 신학의 급가속

아텐은 초기에 "라-호라크티가 수(Shu)의 이름으로 아텐 안에 계신다"는 긴 칭호(이른바 '교학적 이름')로 불림과 동시에 칭호 안에 다른 신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다른 신들의 이름을 걷어내고 '빛' 자체로서의 아텐을 강조하는 후기 칭호 바뀝니다. 즉, 태양신 계열의 요소(라·호라크티·수)를 걷어내고 아텐 자체를 유일 창조신처럼 규정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칭호 개정은 그의 종교가 점차 배타적 일신사상으로 정리되어 가는 징표로 자주 인용됩니다.


3. 해가 떠오르는 곳에 수도를 새로 짓다 - 아케트아텐의 선포

즉위 5년, 왕은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아텐을 위해 유효한 자)으로 바꾸고, 테베와 멤피스의 거의 중간 지점, 나일강 동안의 비거주지를 골라 새 수도 아케트아텐을 선포합니다. 수도의 경계를 알리는 절벽의 '경계 비문(Boundary Stelae)'에 건국 선언과 도시의 종교적 성격을 자세히 새겼고, 5년과 6년(8년에 재확인)의 칙령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 경계 비문은 절벽을 따라 반원형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도시 구성은 오늘날의 계획도시만큼 체계적이었습니다. 남과 북으로 뻗은 로열 로드를 축으로 대아텐신전(Great Aten Temple), 소아텐신전(Small Aten Temple), 왕궁(그레이트 팰리스/킹스 하우스)을 배치하였습니다. 신전은 지붕이 거의 없는 개방형으로 설계되어, 빛과 바람이 제의용 제사대에 쏟아지게 하여 '태양 숭배의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4. "아마르나 미술" - 규범을 깨고 일상의 온기를 그리다

아마르나 시대 미술은 길어진 두개부와 목, 도드라진 배, 부드러운 윤곽 등으로 대표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 왕상에서 보기 어려운 가족의 친밀한 장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텐의 햇살 끝 부분이 '작은 손'이 되어 생명의 기호(앙크)를 왕과 왕비 코·입에 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왕실(왕/왕비)이 아텐의 생명을 직접 부여받는 주체이며 제의의 유일한 집행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편 테베 동부의 카르나크에도 초기 몇 년 동안 '젬-파-아텐(Gem-pa-Aten)' 같은 아텐 신전들을 건설하였습니다. 여기서 대량으로 사용된 작은 석재 블록 '탈라타트(talatat)'는 후대에 다른 건축물로 재활용되었고, 오늘날 학자들이 재활용된 탈라타트를 통해 원래 신전의 흔적을 퍼즐 맞추듯 복원하게 만들었습니다.

 


5. 네페르티티 - "왕의 배우자"를 넘어, 태양 의례의 주연

네페르티티는 단순한 '아름다운 왕비'가 아니었습니다. 아텐 제의(종교 의식)에서 왕과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그려지고, 전차를 몰거나 적을 치는 왕의 포즈에도 함께 등장합니다. 또 아마르나(지역명, 이집트 북부 미냐 주의 유적지)에서는 왕비·공주들을 위한 '선셰이드(Sunshade of Re/Aten)'라는 별도의 성소가 세워졌는데, 콤 엘-나나(Kom el-Nana, 유적지 이름)가 선셰이드 성격을 띄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네페르티티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여성의 생명·풍요 상징이 태양 신앙과 결합한 조각 양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네페르티티의 종교적 권한을 보여줍니다. (Re/Aten은 태양의 신, '라' 또는 '아텐'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Re라고 불렀으나 아마르나 시대에서는 Aten으로 불렀다고 알려집니다.)

기원전 1345년(추정), 아마르나의 조각가 '투트모세'가 당시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모습을 본 떠 제작한 흉상은 투트모세의 공방에 묻혀있다가 3천 년이 지나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네페르티티 흉상은 아마르나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왕비의 존재감을 세계적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 흉상은 베를린 노이예스 박물관(Neues Museum)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1912년 네페르티티 흉상을 발견한 독일의 고고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흉상을 숨기고 불법으로 반출하여 독일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는 이집트의 주장이며 독일은 합법적 취득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6.  네페르티티, 공동섭정이었을까? - 남아있는 논쟁

아케나텐 말년과 사후의 왕위 계승 구간은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네페르티티가 '안크케페루레 네페르네페루아텐'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통치자(혹은 공동섭정)로 잠시 등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스멘카레'라는 인물을 별도의 공동섭정 또는 단명한 후계자로 봅니다. 현존 자료만으로는 스멘카레의 실체와 네페르티티의 파라오 즉위 여부를 확정하기 어렵지만, 말기 도상·비문은 네페르티티의 정치·제의적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시사합니다.


7. 또 한 명의 왕비, 키야 - 그리고 투탕카멘의 어머니는 누구였나

궁정 기록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키야(Kiya)는 한때 투탕카멘의 생모로 거론됐습니다. 그러나 2010년 JAMA에 발표된 DNA 연구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부모가 'KV55 미이라'(아케나텐이라는 주장이 대부분)와 'KV35 젊은 여성(Younger Lady)'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투탕카멘의 어머니는 친자매 계통의 공주로 파악되며, 키야·네페르티티가 투탕카멘의 생모였다는 가설은 현재 근거가 약해진 상황입니다.


8. '편지 더미'가 들려주는 현실 - 아마르나 서신

1887년,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점토설형문자로 된 외교문서 묶음, 아마르나 서신(EA)은 기원전 아케나텐-투탕카멘 시기의 외교 네트워크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가나안과 아무루 등 소왕국들이 파라오에게 구원병·금(金)을 요구하거나 상호 비난을 주고받는 편지가 수백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왕(파라오)의 외교·군사 관심 저하변방 동요로 이어졌다는 후대의 해석에 중요한 1차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9. 개혁의 종말 - "복원 비문"과 테베의 귀환

아케나텐 사후, 소년왕 투탕카아텐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고 전통 신전과 제의(제사 방식)를 복원합니다. 그의 '복원 비문(Restoration Stela)'에는 "신들의 성소가 무너져 길이 되었던 것을 그가 다시 세웠다"는 선언이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문구는 아텐 개혁의 공식 철회전통 다신체계의 복귀를 알려 주는 핵심 자료입니다.


맺음말

아케나텐은 '빛=신'이라는 사상을 도시·예술·의례로 구현했고, 네페르티티는 그 무대의 공동 연출자였습니다. 아케나텐이 지지했던 아텐의 시기는 짧았지만, 경계 비문에서 복원 비문까지 이르는 궤적은 당시의 권력·신앙·도시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