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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여행사전

[룩소르 시리즈 ①] 하트셉수트 여왕과 장제전

by TravelDive 2025. 9. 13.

[룩소르 시리즈 ①] 하트셉수트 여왕과 장제전

 

 


제18왕조를 번영으로 이끈 여왕, 하트셉수트

신왕국의 기초를 닦은 여성 파라오

고대 이집트의 긴 역사 속에서 여성 파라오의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하트셉수트(Hatshepsut, 기원전 1507~1458)는 가장 성공적이고 독창적인 통치자로 꼽힙니다. 그녀는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으며, 어린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섭정으로 권력을 잡고 정국을 이끌다가 마침내 스스로 파라오를 선포했습니다.

하트셉수트의 시대는 단순한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신왕국 초기 제18왕조가 장기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초를 다진 시기로 평가됩니다.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 - 공동 통치의 시작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자 어린 아들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너무 어려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하트셉수트가 섭정을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린 왕을 대신한 후견인이었지만, 곧 자신을 파라오로 선포하면서 남성 파라오의 상징인 네메스 두건과 턱수염 장식을 착용한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하게 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파라오는 반드시 남성이어야 한다는 고대 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트셉수트는 권력을 독점하기보다 투트모세 3세를 공동 파라오로 대우하며 이름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성인이 되어 군사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장례신전) - 절벽에 새긴 불멸의 건축

하트셉수트의 대표적인 업적은 테베(오늘날의 룩소르) 서안 데이르 엘 바흐리에 세운 장제전(Mortuary Temple of Hatshepsut)입니다. 신전은 측근이자 건축가였던 세넨무트(Senenmut)가 총괄하여 설계했으며, 3단의 테라스 구조가 절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독창적인 형태를 자랑합니다.

  • 위치: 제11왕조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 옆에 지어, 스스로를 "옛 왕조 재통일자의 후계자"로 연결하려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음
  • 구조: 3단 테라스 구조. 1층 참배로에는 스핑크스와 기둥이 줄지어 있었고, 2층에는 회랑과 신전 입구가, 3층에는 아문·하토르·아누비스 신전이 배치됨
  • 벽화와 부조: 푼트 원정 장면, 여왕의 신적 출생 이야기, 오페트 축제와 제례 장면 등이 정교하게 새겨짐
  • 예술적 가치: 절벽과 건축물이 하나의 풍경처럼 이어져, "고대 이집트 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례미"라는 평가를 받음

신전 벽에는 푼트 원정 장면, 신에게 제물 바치는 모습, 여왕을 신의 딸로 묘사하는 장면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푼트 원정을 묘사한 부조에서는 이국의 나무와 동물, 그리고 병으로 인해 부은 듯 묘사된 푼트 여왕의 모습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집트 미술의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신전은 테베(룩소르) 서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며, 기자의 피라미드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입니다.


푼트 원정 - 바다를 건너 이룬 외교적 성과

하트셉수트 통치의 백미 중 하나는 푼트(Punt) 원정입니다. 푼트는 오늘날 에리트레아~소말리아 연안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향료·금·상아·이국적 동물을 교역할 수 있는 중요한 대상지였습니다.

그녀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교역을 재개했고, 이 원정은 장제전 벽화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집트 경제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하트셉수트의 외교적 능력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세넨무트와 별자리 지도

하트셉수트 곁에서 특별히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세넨무트입니다. 그는 왕녀 네페루레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궁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장례신전 건축을 주도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신전 지하에 자신의 무덤을 준비했는데, 그 천장에는 고대 이집트 최초의 천체도(별자리 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고대 이집트 천문학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카르나크(카르낙) 신전의 거대한 오벨리스크

하트셉수트는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을 확장하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대형 오벨리스크들을 봉헌했습니다. 현재 한 기는 직립한 채 남아 있고, 또 한 기는 쓰러져 성스러운 연못 옆에 있습니다.

후계자인 투트모세 3세가 이 오벨리스크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석탑으로 감싸면서 도상을 가렸다는 해석과, 결과적으로 보존 효과가 있었다는 해석이 함께 존재합니다. 덕분에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왕의 미라를 찾아서

하트셉수트의 무덤(KV20)은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 중 하나지만, 여왕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인근 KV60에서 발견된 여성 미라 중 한 구가 양팔을 교차한 왕의 자세를 하고 있었고, 2007년 치아 분석 결과 하트셉수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학계의 주류 견해는 이 미라가 여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분석 방법과 표본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투트모세 3세와 '지워진 이름'

하트셉수트가 사망한 뒤, 투트모세 3세는 약 20년 후부터 장제전과 기념비에 남은 그녀의 이름과 형상을 체계적으로 삭제하기 시작했습니다.

  • 과거에는 이를 두고 개인적 원한 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현재는 여성 파라오라는 전례를 없애고 후계자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 삭제 작업이 여왕 사후 즉시가 아니라 수십 년 후에 이뤄졌다는 점도 이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결국 하트셉수트의 이름은 돌에서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건축물과 제도, 경제적 번영의 성과는 제18왕조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맺음말 - 영원히 남은 여왕의 흔적

하트셉수트는 자신을 신의 딸로 선포하며 파라오의 정통성을 확보했고, 내정과 외교, 건축과 종교 개혁을 통해 이집트를 번영시켰습니다. 그녀의 장제전 벽에는 지금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은 영원히 남으리라. 내가 세운 기념비가 나를 기억하게 하리라."

 

실제로 오늘날 수많은 여행자가 룩소르 서안에서 하트셉수트 장제전을 올려다보며, 여왕의 그 다짐을 눈으로 확인합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의 위엄을 상징한다면, 하트셉수트 장제전은 여성 파라오의 지혜와 야망이 빚어낸 불멸의 기념비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