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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여행사전/이집트

[피라미드 시리즈 ⑤] 피라미드의 쇠퇴와 새로운 무덤 양식

by TravelDive 2025. 9. 7.

피라미드의 쇠퇴와 새로운 무덤 양식

[피라미드 시리즈 ⑤] 피라미드의 쇠퇴와 새로운 무덤 양식

 


1) 절정기 이후의 변화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완성된 제4왕조 시기는 피라미드 건축의 황금기였습니다.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단순한 왕릉이 아니라, 파라오의 신적 권위와 태양신앙의 절정을 드러낸 상징이었죠. 그러나 제5왕조에 들어서면서 피라미드 건축은 점차 작아지고 단순화되었습니다. 거대한 석재를 수백만 개 동원하던 시대는 끝나고, 피라미드는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2) 거짓 피라미드와 과도기적 시도

쇠퇴 이야기를 하기 전, 잠시 과도기의 한 사례를 짚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제3왕조 말기 혹은 제4왕조 초기에 지어진 메이둠 피라미드는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흔히 "거짓 피라미드"라 불립니다. 전통적으로는 후니가 착공하고, 스네프루가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스네프루 단독 건설설도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건축물은 원래 계단형이었지만, 외장을 덮어 매끈한 피라미드로 만들려다 붕괴했습니다. 지금은 외벽이 무너져 세 겹의 거대한 탑처럼 보이며, 아랍어로도 "엘 헤라미 엘 카다브(거짓 피라미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는 피라미드 건축이 계단식에서 매끈한 사면으로 발전하는 실험 단계에서의 실패작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3) 제5·6 왕조의 작은 피라미드

제5왕조 파라오들은 여전히 피라미드를 지었지만, 규모는 이전보다 확연히 축소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부시르(Abusir) 지역에 있는 네페리르카레, 니우세레 등의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원래 설계 높이는 45~70m 범위였으나, 내부 코어를 흙과 잡석으로 채운 탓에 지금은 절반 이하로 붕괴되어 언덕처럼 보입니다.

이 시기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보다 태양신전 건설에 힘을 쏟았습니다. 우세르카프와 니우세레는 아부시르 북쪽 아부 구라브(Abu Ghurab)에 태양신 라를 위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는 왕권 강화 수단이 피라미드에서 태양신 숭배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제6왕조에 이르면 내구성은 더욱 떨어집니다. 테티, 페피 1세, 메렌라, 페피 2세의 피라미드는 석회암 블록 대신 흙과 잔재로 채워져, 오늘날에는 거의 흙더미 같은 모습입니다.


4) 피라미드 텍스트의 등장

비록 외형은 축소되었지만, 이 시기 중요한 혁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피라미드 텍스트(Pyramid Texts)입니다.

  • 제5왕조 말 우나스(우니스) 왕의 피라미드 내부에 처음 등장
  • 이후 제6왕조 왕들의 피라미드에도 새겨짐
  • 내용은 사후 세계에서 파라오가 무사히 부활하고 태양신 라와 함께 항해할 수 있도록 돕는 주문과 의식문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 중 하나로, 후대의 관 문헌(Coffin Texts), 더 나아가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로 발전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피라미드 텍스트와 관 문헌은 왕실 중심 문헌이었고, 〈사자의 서〉는 왕족·귀족·민간 무덤에도 널리 사용되며 대중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피라미드의 크기가 줄어드는 대신, 내부의 상징성과 종교적 장식은 더욱 풍부해졌던 것입니다.


5) 제1중간기의 혼란과 중왕국의 재도전

제6왕조 말기, 장수한 페피 2세의 치세가 끝나면서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지방 총독(노모스 총독)들이 힘을 키우며 이집트는 분열했고, 이 시기를 제1중간기라고 부릅니다. 이 혼란 속에서는 더 이상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울 여력도, 필요성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제12왕조로 이어진 중왕국 시대(기원전 20~18세기경)에 이르러 파라오들은 다시 피라미드 건설을 시도합니다. 수도를 엘 리슈트(El-Lisht)로 옮긴 후, 아멘엠하트 1세와 세누스레트 1세가 각각 피라미드를 세웠습니다. 이어 세누스레트 2세의 엘 라훈(Lahun) 피라미드, 아멘엠하트 3세의 다슈르 '흑색 피라미드(Black Pyramid)'하와라 피라미드가 대표적입니다.

이들 피라미드는 기자의 피라미드에 비해 규모가 작고 내부 구조가 복잡했지만, 건축 재료가 석회암 대신 잔재·흙을 채운 코어였던 탓에 보존 상태가 매우 나쁩니다. 여기에 지반과 지하수 문제까지 겹치면서 붕괴가 심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중왕국 피라미드는 언덕 같은 흙무더기로 남아, 웅장했던 원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6) 하와라 피라미드와 "미로"의 전설

특히 아멘엠하트 3세가 지은 하와라 피라미드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로(Labyrinth)"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곳을 "피라미드보다 더 경이로운 건축물"이라 칭하며, 수천 개의 방과 끝없는 복도를 묘사했습니다. 실제 발굴 결과, 복잡한 방 배치와 미로 같은 구조가 확인되었지만, 그의 기록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아마도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무덤처럼 이곳 역시 도굴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7) 신왕국의 새로운 장례 양식  왕가의 계곡

제2중간기의 혼란이 끝나고,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를 몰아내며 신왕국(제18~20왕조)이 시작됩니다. 이 시기 파라오들은 더 이상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지 않았습니다. 대신 룩소르 서안에 있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암굴형 석굴 무덤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도굴 방지: 거대한 피라미드는 멀리서도 눈에 띄어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왕가의 계곡은 협곡 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어 무덤 위치를 감추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2. 종교적 변화: 태양신 중심 신앙에서 점차 오시리스 신앙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무덤 내부 벽화는 태양의 신선한 부활뿐 아니라, 밤을 지나 저승을 항해하는 파라오의 여정을 그렸습니다.

8) 무덤 벽화와 장례 문헌

왕가의 계곡 무덤 벽에는 수많은 종교 문헌과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 〈아무두아트(Amduat, 밤의 서)〉: 태양신이 밤 동안 저승을 통과하는 과정을 묘사
  • 〈게이트의 서(Book of Gates)〉: 저승의 문과 수호자들, 파라오가 통과해야 하는 시련을 설명
  • 〈동굴의 서(Book of Caverns)〉, 〈라와의 합일(Litany of Re)〉

이들은 제5·6왕조의 피라미드 텍스트에서 발전한 왕실 전용 장례 문헌으로, 귀족 무덤의 〈사자의 서〉와 차별화됩니다. 오늘날 여행자가 왕가의 계곡을 방문하면, 기자의 피라미드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채색 벽화와 장례 신화를 직접 감상할 수 있습니다.


9) 피라미드 시대의 종말

결국 신왕국 이후, 피라미드는 더 이상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왕실 무덤은 암굴 속에 숨겨졌고, 귀족 무덤은 벽화와 부장품으로 채워졌습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기념비로 남았지만, 피라미드라는 건축 양식 자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맺음말

피라미드는 처음에는 계단형에서 매끈한 형태로 발전하며 왕권의 절정을 보여주었지만, 이후 작아지고 내부 장식이 강조되다가, 결국 암굴 무덤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건축 양식의 진화가 아니라, 이집트 사회의 정치적 상황, 종교적 변화, 도굴 방지 노력이 모두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기자의 피라미드는 피라미드 시대의 정점이자 동시에 끝나가는 서곡이기도 합니다. 그 뒤를 잇는 왕가의 계곡 무덤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파라오의 영생을 꿈꾸며, 새로운 장례 문화를 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