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궁중음식의 배경과 체계
왕실은 국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같은 일상식이라도 최상의 재료·정교한 솜씨·격식 있는 예법이 결합해 '모범 식문화'를 형성했다. 조선 초기에는 『경국대전』이 궁중 식사 관련 직제와 규정을 제시했지만, 실제 상차림과 조리·그릇에 대한 상세 기록은 1600년 이후의 의궤류(『진연의궤』·『진찬의궤』 등), 『왕조실록』, ‘궁중 음식 발기’에 풍부하게 남았다. 이 자료들로 기명(器皿), 조리기구, 좌열·상차림 구성, 음식명과 재료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궁궐은 현대 호텔의 다중 주방처럼 기능별로 분화됐다. 생과방은 평상시 수라와 다과·음료를, 소주방은 내·외소주방으로 나뉘어 조석 수라와 반찬(내소주방), 연회·진연 음식(외소주방)을 맡았다. 대연회 때에는 임시조직 숙설소도 운영했다. 경사 뒤에는 어상(御床)에 올랐던 음식이 종친·당상가에 하사되며 민간으로 전파되었고, 사대부가의 고임(高饌) 문화 또한 이 흐름 속에서 체계화·대중화됐다.
궁중음식이 한국 음식의 정수로 평가받는 이유는, 각 도의 진상품과 주방상궁·대령숙수의 고급 기술이 만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의 혼인 관행(동성동본 금혼, 사대부와의 혼인 연계)으로 왕실과 민가 사이에 의례·음식 교류가 잦아, "궁중만의 별종"이 아니라 민간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정착·세련화되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2. 궁중의 명절·시절식 개관
절식은 명절에 올리는 음식, 시식은 계절 식재로 빚는 요리를 뜻한다. 궁중의 큰 명절로는 정조(正朝, 설)·망일(望日, 정월 대보름·상원)·동지, 그리고 왕의 탄일이 꼽힌다. 단오·추석은 민가에서 더 크게 즐겼지만, 궁중도 사시(四時)에 맞춘 시절식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국대전』과 의궤류에는 하례 절차와 진찬 품목이 정연하다.
- 정월 초하루(정조): 떡국을 올리는 정다례가 기본. 떡국·만둣국·약식·강정·다식·정과·전유어·편육·동치미·젓국지 등이 '세찬(歲饌)'으로 오르며, 내전에서는 윷놀이·투호 등 세시 놀이가 이어졌다.
- 정월 대보름(상원/망일): 약식(약밥)·오곡밥·부럼·묵은나물·원소병·복쌈 등이 대표. 궁중에서는 선무사에서 들여온 호두·잣·밤·대추를 생과방이 손질해 올리고, 일부는 하사하였다.
- 정월 고사(세시 고사): 붉은팥 시루떡을 시루째 올려 액을 물리고 안녕을 비는 의례가 궁중 각 전각에서도 행해졌다.
- 입춘: 경기 육읍에서 들여온 입춘채(立春菜)-움파·미나리싹·산갓 등 '오신반(五辛盤)' 성격의 봄나물-로 새 농경의 시작을 알렸다.
- 삼짇날(上巳): 화면(和麵)·꽃전(특히 두견화전)·청주 등을 올리고, 도회 밖에서 기로회가 열리기도 했다.
- 한식: 동지로부터 105일째, 종묘·가묘에 간소 제를 올리고 찬 음식 중심으로 술·과일·포·떡·국수·적 등을 진설.
- 단오(端午/천중절):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세시풍속과 함께 증편·수리취 절편·제호탕·생실과·만두·알탕 등. 수레바퀴 문양을 찍은 차륜병이 상징적이다.
- 유두(流頭): 맑은 물가에서 몸·머리를 씻고 수단·건단·유두면을 종묘에 천신. 봉선화·감국 화전, 밀쌈·구절판·어채와 여름 화채가 곁들여졌다.
- 사빙(賜氷): 유월 중순경 동·서빙고의 얼음을 관아·기로소에 나눔. 왕실·제사의 냉장 자원 관리였다.
- 삼복: 민가의 동지 팥죽과 달리, 궁중은 동지와 초·중·말복에도 팥죽을 고루 쑤어 더위와 액을 막았다.
- 칠석: 밀전병·증편·육개장·어선·복숭아 화채·오이김치류 등.
- 한가위(中秋): 오려송편·토란탕·잡채·화양적·햇과일이 대표.
- 중양절(重陽): 감국전·밤단자·유자화채 등 가을 절정의 향을 살린 다과.
- 동지: '작은 설'로 여겨 팥죽·전약·식혜·수정과·동치미를 즐겼고, 관상감이 새해 달력을 올려 반포했다.
- 납일: 동지 뒤 셋째 미일(未日). 수렵 해제와 함께 소주방이 야외 진찬을 준비하고, 돌아와 잡은 산짐승으로 납평전골을 베풀었다.
- 타락죽(酪粥): 음력 시월 초하루부터 정월 사이 내의원이 우유 죽을 만들어 진상. 고려 이래의 낙(酪) 문화가 조선에서도 왕실 보양식으로 계승됐다.
3. 궁중의 일상식과 수라 운영
왕실의 하루는 초조반-수라(아침)-낮것-수라(저녁) 네 흐름이 기본. 탕약이 없는 날 초조반은 잣죽·깨죽·미음류에 맑은 조치, 물김치, 마른찬을 반주(飯胄)로 곁들였다. 주 식사인 수라상은 통상 12첩 반상으로, 반가의 7·9첩보다 한 층 더 화려하고 정제되었다.
- 기명과 상차림: 겨울엔 은반상기, 여름엔 사기 반상기를 썼고, 수저는 사철 은을 사용(은 변색으로 독을 미연 예방한다는 관념). 주발·탕기·조치보는 대·중·소 세트로 맞추어 겹치되, 토장 조치는 뚝배기를 쓰는 등 ‘기능 우선’도 병행했다. 상은 주칠한 대원반·소원반·책상반 3원 체계, 전골용 화로·틀을 별도 준비했다.
- 반배법(飯配法): 대원반 전면 기준 오른쪽 국-왼쪽 수라가 원칙. 청장·젓국·초고추장·겨자 등 종지류는 밥·국 다음 줄에, 따뜻하고 손이 자주 가는 찜·구이·회·김구이·물김치는 주로 오른편에, 젓갈·자잘한 밑반찬은 왼편에 놓았다. 입에서 뼈·가시를 뱉는 비아동(避牙筒)을 좌측 끝에 둔다.
- 시중 절차: 왕·왕비가 정좌하면 수라상궁이 쟁첩 뚜껑을 차례로 열고, 기미상궁이 맛을 본 뒤 "젓수십시오"를 아뢴다. 국이 끝나면 차수(숭늉)를 올린다. 퇴선 후 남은 음식은 상궁들의 두레반으로 돌려 낭비를 줄였다.
일상 수라의 실물 스펙트럼은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극적으로 남아 있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 회갑에 수원 화성으로 모후를 모시고 나가 베푼 진찬에서, 아침·점심·저녁 수라, 다과, 죽·미음·응이상, 전약·정과까지 식의(食儀)와 메뉴·동선이 시뮬레이션 하듯 기록되어 궁중 상차림의 표준을 보여 준다.
'알쓸여행사전 > 세계의 식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한국 전통음료의 의의·역사·종류 (0) | 2025.10.08 |
---|---|
[한국] 한국의 전통 과자, 한과의 역사·종류·맛 (0) | 2025.10.07 |
[한국] 떡의 이해: 역사·분류·상징, 그리고 오늘의 식탁까지 (0) | 2025.10.07 |
[한국] 세시 풍속 음식: 절기·의례·상징, 그리고 오늘의 적용 (0) | 2025.10.06 |
[한국] 한국의 통과 의례 음식: 탄생에서 제례까지 (0) | 2025.10.06 |